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창랑호 납북 사건 (문단 편집) == 사건 이후 == 창랑호 사건을 겪은 후 대한민국 정부와 항공사는 완전히 [[충공깽]]을 당했으며 이후 재발 방지를 위해 항공기 탑승자의 총기 등 위험물 소지에 대한 단속과 항공기 운항에 대한 공중 감시를 강화했다. 하지만 그로부터 11년 뒤인 1969년 [[대한항공 YS-11기 납북 사건]]이 터졌다. 한편 북한으로부터 창랑호의 기체를 반환받지 못한 KNA는 운행상의 커다란 타격을 받아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골머리를 앓게 되었다. 본 사건에 앞서 1957년 7월 7일 만송호가 부산 수영 비행장에 착륙 도중 추락하는 사고로 인해 기체가 전손 처리되어(인명피해는 없었음) 상당한 타격을 입은 마당에 창랑호 납북 사건까지 터져서 당장 보유 기체가 [[우남호]] 1대밖에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.[* [[우남호]]는 이후 대한항공에 인수되어 1971년까지 총 36,216시간 비행 기록을 남기고 퇴역한 뒤 현재는 [[인하대학교]] 캠퍼스에 전시되어 있다. ] 이에 KNA는 1959년 4월 22일 DC-3기 1대를 추가 도입하여 그날로 국내선에 투입하였고 동년 7월 28일에는 미국 록히드사에서 [[록히드 컨스텔레이션 시리즈|콘스틀레이션]] 749A 4발 여객기 1대를 임차하여 국내선과 국제선에 병용 취항하여 도입 20여일만에 50명의 유학생을 태우고 태평양을 횡단했으며 서울 ― 시애틀간을 부정기 운항하기도 하였다. 하지만 적자를 해소하지 못하여 1961년 7월 16일 [[신용욱]][* KNA의 창업자로 1953년 동양인 최초로 3천시간 무사고 비행 기록을 세운 실력있는 조종사였고 1950년과 1954년에는 민의원에 당선될 정도로 정치에도 야망이 있었다고 한다.] 대표가 [[한강]]에 [[투신자살]]하였고 1962년 11월 13일 KNA는 폐업 처리되었다. 헌데 [[5.16 군사정변]]으로 정권을 잡은 군부(국가재건최고회의)는 이미 이전부터 KNA를 구제하기 위한 방안을 검토해왔는데[* 이 때문인지 민영 항공사인 한국항공(한진 계열)이 문을 닫았다.] 부채가 너무 크고 다양한 부실 요소들을 내재하고 있어서 [[답이 없다|답이 안 나오는]]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예 국영기업으로 바꾸기 위해 '''대한항공공사법'''을 제정하였고 1962년 9월 [[대한항공]]을 설립했다. 그러나 대한항공공사가 결항률 18%를 기록하고 각종 정비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보고 [[민영화]]를 결정해 1968년 11월 1일 [[한진그룹]]이 대한항공을 인수하게 되었다. 그리고 김기완은 이후 김재권이란 가명[* 개명한 건지는 확인이 안 된다.]으로 일본 영사로 부임하여 [[김대중 납치사건]]에 가담했다. [[가해자가 된 피해자|납치 피해자가 납치 가해자가 된 아이러니한 경우다.]] [[분류:1958년 항공사고]][[분류:제1공화국/사건사고]][[분류:김일성 시대]][[분류:대한민국의 항공사고]][[분류:북한/대남 도발]][[분류:하이재킹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